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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쓰다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나를 알기 위해 쓴다

by Gyul_00 2021. 2. 21.

 

*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 / 허새로미

 

최근에 영어 공부하는 게 너무 짜증 나고, 뭔가, 제대로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하기가 싫고 뭐 이런 기분 때문에 좀 동기부여를 해볼까 하고 찾아 읽었는데, 이건 영어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언어,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관계와 방식에 대한 책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은 좋았다. 

 

특히 너 눈치 없잖아. 이런 말을 종종 들어왔던 나는, 책의 앞단이 눈치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더 훅, 들어가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건.. 맞아.. 나 역시 가까운 이들에게서 받는 부정적 평가에 마음을 많이 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친밀한 관계에서, 내 감정이나 느낌들을 설명할 단어를 필요할 때 찾지 못한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특히 부정적인 기분이 차오를 때,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까, 즉각적으로 기분이 나쁘거나, 무시당하거나, 짜증이 나거나 억울한 기분이 들었을 때, 나는 이런 기분이 들었다. 에서,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꼈는지, 너의 어느 지점이 그랬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했다. 오히려, 일하는 관계는 일로 밀고 나가면 되니, 내가 밀쳐진다는 느낌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일 욕심을 부리고 일의 주도권을 잡으려 더 애써서였던 것 같고. 친밀한 관계에서 내가 부정당한다는 기분이 종종 들 때,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 

 

대체로 그런 감정은, 내가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다는 느낌에서 오겠지. 그런데 그런 감정들,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자꾸 붙들며 나는 결론을 이거 너무 자격지심 아닌가? 하며, 그걸 계속 그렇게 느끼는 나의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려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정리도 잘 되지 않는 말을 꺼내놓기 시작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과, 상대가 난 아닌데라고 말했을 때의 무안함, 나의 속좁음 같은 것들, 관계의 어색함 등등을 신경 쓰게 될 테니, 이런 걸 피하려 한 걸 수도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아무리 사적인 관계라 하더라도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과 관계가 있다. 대단히 내가, 뭘 쥐고 네가 엄청 굽신거리는 게 아니라, 대체로 대화와 관계의 주도권 같은 게 있으니까. 그래서 특히 연애관계에서, 의사소통의 주도권, 상황의 정리, 질문의 주도권이 바뀌거나, 달라지는 것을 수용하지 못할 때- 복잡한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다. 관계의 주도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면, 그 관계가 오래가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면, 관계가 변하는 만큼 언어가 바뀌지 못했다는 거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 나를 알기 위해 쓴다 / 정희진 

 

설 연휴기간을 시작으로 글쓰기나 책읽기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계기가 하나 있었는데, 아직도 그 생각은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글을 쓰고, 어떻게 사유하고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이 질문을 이렇게 무겁게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블로그에,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글을 주저리 쓰고 있는 것도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선택한 것이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읽은 전공과 상관없는 책이나 글과, 연구주제에 관한 논문이나 책에 대한 글을, 메모 수준이라도 올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여하튼 정희진의 책을 읽으면서- 나의 글쓰기의 고민에 주요 단어로 삼아야 하는 것이 '상투성'인 것 같다. 그것이 정희진의 책을 읽으며 내가 얻은 것이다. 상투성을 그대로 두면, 글쓰기는 쉬워진다. 해석과 의미의 차이를 찾을 필요가 없으므로, 글쓰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페미니즘이야 말로 그 상투성을 벗어나는, 벗어나고자 끊임 없이 노력하는 학문이라는 정희진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상투성을 벗어나는 것은, 세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언어에 속지 않는 법>에서처럼 그동안 지워진 경험과 상처와,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여 더 넓게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때때로 어떤 이들의 글은, 똑같이 한국말을 쓰는데도 나와 완전히 다른 말을 구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너무 투박하고 뭉뚱 한 나의 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