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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쓰다

이야기를 전유하여 이야기가 되다: 키키 스미스 전시회

by Gyul_00 2023. 1. 29.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성서는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도 성서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이를 외워 구전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성서학자들이 자음으로 가득 찬 성서에 모음을 가져다 붙였고 모음을 붙이는 방식에 따라 단어가 달라지는데, 그 대표적 예가 신을 지칭하는 여러 단어들이다. 그러니까 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이집트로 가서 민족을 구하라고 명령하는 신에게 묻는다. 사람들에게 가서, 하느님이 나를 당신들에게 보냈다 하면 그들이 내게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않겠냐고. 그러자 신은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며,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인 자신이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과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신은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한 존재로 스스로의 이름을 '야훼'로 일컫는다(탈출기 3:14-4:17). 이 야훼라는 이름은 한동안 여호와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성서의 기록과 구전, 언어의 소멸과 변화의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이다. 그러나, 신이 여호와라 불리거나 혹은 야훼로 불리거나. 그 발음이 무엇이든 신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으로 이사악의 하느님으로,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과 예수를 지나 그리고 기독교 인들의 삶의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까 신이 초월자이면서 동시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시대를 넘어서고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다.

이야기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신이다. 신이 곧 내 삶의 이야기가 됨으로써 기독교 인들은 자신의 삶이 신이 친히 내린 소명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신이 이야기이므로, 나는 신의 이야기에 쓰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인들에게 역사는 신의 것이 된다. 신이 야훼이거나 여호와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신의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 예수와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로 존재할 수 있다 것이 중요하다. 무수히 많은 이야기. 그래서 여기에서는 분노하는 신이었다가 저기에서는 한없이 사랑하는 신이며, 여기에서는 호통하는 신이었다가 저만큼에서는 애절하고 비통한 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더 많은 이야기를 가진, 타인의 삶을 넘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다. 이야기의 양면성도, 모순도 상관없다. 그 이야기가 다양할수록, 더 모순될수록 그것이 오히려 이야깃거리가 된다. 동시에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 존재의 서사가 하나뿐이거나 몇 개 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떠밀리며 이야기를 찾아 나선다.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누구의 것인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새로운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들며 세상의 이야기와 싸운다. 한편 현대인들은 자기 이야기의 자리를 신에게만 내주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이 내가 아닐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사람들 나를 찾아가는 놀라운 여정으로서 미라클 모닝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기적과 예언의 자리 성당을 짓는 중세인들의 노력처럼 진짜 나를 찾기 위한,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기 위한 기적을 쫓아 헤맨다.

그래서 여성의 몸에 대한 관습을 비틀어 내는 작품들은 키키스미스는 마땅히 페미니스트 작가로 보이게 한다. 기존의 관점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과 선언과 같은 작품들은 여성의 몸과 이야기를 여성의 것으로 찾아오기 위한 노력들이 줄을 잇던 작품들과 계보를 나란히 하는 것도 같다. 어머니 어거나 창녀인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이 만드는 이야기로 전유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함께, 그녀의 작품이 이야기를 전유하여 선언이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야기 그 자체가 되었다고 느꼈다. 상징을 비틀고, 전유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야기가 된 여성, 이야기가 된 신체, 이야기가 된 이야기들이 키키 스미스의 전시에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는 짐승이 된 여성들, 짐승에서 나온 여성들, 마녀가 된 성녀와 소녀가 된 성녀가 함께 있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나, 진정한 여성,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나를 찾을 것을 종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도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녀이면서 동시에 소녀인, 그러면서 늑대이면서 괴물인,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여성들은 그것으로 일생이 끝나지 않고 이야기가 되어 전승된다. 이야기가 긴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폭포수 같이 쏟아지고 이어진다.

키키 스미스, 물고기를 잡고 있는 물수리. 2017


** 작가가 새를 많이 그린 것도 약간, 취향이었던 것은 요즘 탐조한다고 허풍 떨고 있어서. 찍은 작품 중 좋기도 했고, 그나마 사진이 좀 찍힌 하나. 아래는 전시 안내.


https://sema.seoul.go.kr/kr/whatson/exhibition/detail?exNo=1113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