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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매일

직선으로 걷다

by Gyul_00 2018. 5. 23.


직선으로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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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키가 컸고, 안경을 썼다. 마른 체형에 군살이 없었다. 앞머리를 묵직하게 내린 옆 가르마, 특별할 것 없는 머리를 했다. 카라가 잡혀 있는 셔츠를 즐겨 입었고 단화에 청바지를 입는 남자였다. 밥을 먹을 때면 가만히 수저를 집었다. 가지런하게 느꼈고 단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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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는 어느 날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셨고 해가 뜰즘 헤어지며 키스를 나눴다.

단호하게 말 하는 것보다 단호하지 못한 나는 애매하게 그 사람을 피해 다녔다. 싫다고 티를 내는 만큼 싫어하지 못했던 나는 그 사람 주변을 서성거렸다. 서성거리며 나는 원을 그렸다. 단정한 사람이 한 가운데서 서성거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원을 그리는 내게, 그 사람은 중심을 벗어나 직선으로 왔다. 손이 닿았고, 원이 찌그러졌고 나는 편지를 썼다. 내가 서성이며 그린 커다란 동그라미가 나의 비겁함이었음을 이야기 했다. 우리는 이제 손을 잡았고, 우리의 발걸음은 직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정한 사람과 함께 걸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는 직선도 단정했다. 싫다고 티를 내는 만큼 싫어하지 못했던 나는, 좋은 것을 좋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이야기 했다. 나보다 열 살이 많았던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이 우리가 함께 그리는 직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직선위에 함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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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했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연애를 하면서 성장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고 답했다. 하루는 길을 건너다가 크게 다쳤다. 상처가 컸지만 숨길 수 있었다. 상처가 자랑스러울 이유는 없었으므로 상처를 이야기 하지 않고 사랑한다 말 했다. 사랑이 무엇이냐 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처가 곪을 것 같아 곪기 전에 상처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상처는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치욕이 곧바로 불행은 아니었으므로 자랑스럽지 않았지만 상처를 보여줬다. 그러나 보여준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끄럽다는 것은 잔인하게 불행한 일이었다. 상처를 천천히 바라보던 단정했던 사람은 단정하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섰다. 나는 내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걷어붙인 옷을 어쩌지 못하고 단정치 않게 광화문 네거리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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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 사람은 다정하지 않았다. 다정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은 사람은 상처를 보고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위로조차 건네지 않은 사람은 뒤돌아 흔들리지 않고 직선을 그으며 걸어갔다.단정치 못한 나는 사랑한다고 말했다. 답을 듣지 못한 나는 다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을 듣지 못한 나는 사랑은 비겁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단정한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직선을 그으며 걸었다. 불행을 치욕으로 견뎠고 치욕을 부끄러움으로 견뎠고, 부끄러움을 상처로 견뎠고 상처를 사건으로 견뎠다. 사건이 흉터로 남자, 단정했던 사람 걸어간 직선이 보였다. 내가 걸어갔던 직선도 보였다. 우리는 층을 달리하고 직선으로 걷고 있다



* 3년 전, 일기인데. 지금은 대각선이구나... 대각선으로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