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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매일

머리를 숙이며 걷다

by Gyul_00 2019. 10. 6.

 



갑자기 배 밭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가든형 불고기 집과, 닭 백숙집을 지나 서울 변두리, 한적한데 정리 안된 동네길을 걷다가 갑자기 배밭이 나왔다. 지난 주말 내내, 서울 외각에 있는 수도원에 있었다. 별 일도 없는데 괜히 속이 시끄러워서 어디라도 가야겠다 싶어, 찾았다. 

수확을 앞둔 수확을 앞둔 배들은 회색 갱지같은 것들에 씌워져 있었다. 곳곳에 떨어진 배들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볕도 좋고 바람도 좋았다. 자매님 지름길은 배 밭인데, 고개를 숙이며 걸어야 합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배가 떨어집니다.  숙소와 성당 사이에느 꽤 넓은 배 밭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수도원을 안내해준 수사님의 설명을 따라 주말 내내 머리를 숙이고 배 밭을 오고 갔다.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살고 있는 수도자들을 따라 기도하고 미사를 보기 위해 배 밭을 자주 오고 갔다. 그 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하며 들렸던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떠올렸다. 어느 사원이었는지, 사원의 중심으로 갈 수록 계단은 좁고 높아져, 몸을 숙이고 기어가듯 올라가야 했던 것을 기억한다. 신성한 곳으로 향하는 길, 그 자체를 자신의 몸을 낮추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게 만들었구나 생각한 건 나중 일이다. 어느 곳이든 신성한 곳으로 가기 위해 몸을 낮춰야 하다면, 여기 수도원에서는 이 배밭이 그러한 곳인가 보다. 새벽 기도시간이나 저녁, 주말의 아침미사시간을 맞춰 걸으며 십수년 전의 배낭여행지의 신성한 곳도 떠올렸으니 말이다. 신을 만나기 위해 몸을 숙이고 걸어야 하는 시간. 길은 고되지 않았고, 예쁘고 반짝거렸다. 언젠가, 꼭 한번은 몸을 숙이며 이곳에서 노동하며 며칠을 보내야겠다 생각했다.